2020-01-09 08:30  |  오피니언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 ③] 추억이 추억을 만들고 동강과 절벽이 만드는 풍경,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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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있는 풍경-정선', 183×270cm, 한지에 먹, 2006 / 그림=추니박
[아시아아츠=글 그림 추니박]
정선군 어디를 가도 내 추억이 묻지 않은 곳이 없고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나는 지난 30여 년 정선을 누비며 스케치를 다녔다. 정선의 동쪽에서 서쪽,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없이 다니며 얼마나 많은 화첩을 그림으로 채웠을까! 그 그림만큼의 사연과 추억이 정선에 남아 있으니 정선은 내가 숨을 멎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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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떤풍경-정선', 79X128cm, 한지에 먹, 2010 / 그림=추니박

내가 정선을 처음 가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즈음이다. 티브이를 틀었는데 마침 정선 아우라지에서 마포나루까지 뗏목을 타고 나무를 팔러 오는 정선 사람들의 옛날 모습을 재현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옛날 일복을 입은 힘센 아저씨 둘이 적송으로 엮은 뗏목을 타고 노를 젓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그 배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길로 청량리 역에 가서 밤기차를 타고 정선을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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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가는 길', 80X93cm, 한지에 먹, 2008 / 그림=추니박

그냥 마음에 꽂혔으니 아무 계획도 없이 스케치북만 챙겨서 기차를 타고 증산을 거쳐 새벽녘에 정선 다음 역인 나전역에 발을 디뎠다. 벌레가 바글바글 대는 역 앞 가로등 불빛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적막한 낯선 곳의 새벽,,,,나는 낡고 긴 의자에 누워 잠을 자보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강원도 정선하면 그저 탄광촌 많은 동네로만 인식이 돼있었고 사람들은 감자만 먹고사는 걸로 알고 있던 터라 내심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고 있는데 멋진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나전역 역장님과 인연을 맺어서 나는 며칠간 그분의 사택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역장님이 근무하는 날엔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역장님의 비번 날엔 둘이서 아우라지나 정선장 등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 당시 인기 좋은 역장님 덕에 기차도 공짜로 타고 유원지나 음식점의 아주머니들이 빈대떡도 그냥 부쳐 주셔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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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연포마을사생' 28X40cm, 화첩에 먹, 2009 / 그림=추니박

주머니에 달랑 기차 삯만 들고 갔으니 공짜로 얻어먹는 행운은 하느님의 선물 같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듯싶다. 나는 그때마다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그려드렸는데 그 바람에 서비스로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안주를 더 먹을 수 있어서 우리의 콤비가 완벽하다고 역장님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이 그만큼 역장님이 동네에서 인심이 좋은 분이셨다는 증거였다. 원래 영주 분인데 혼자 파견 근무를 하셔서 몹시 외로워하시고 가족들을 그리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정선의 풍경과 정선의 사람들에게 푹 빠지게 되니 그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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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정선의 4월', 59X124cm, 한지에 먹, 2009 / 그림=추니박

그리고 1년 뒤 나는 방학 때 와이프를 데리고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제일 먼저 갔던 곳이 정선 나전역이다. 그 역장님과의 추억이 서린 곳을 와이프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고 그때 기억해 뒀던 좋은 장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 시절에도 열심히 스케치를 하고 틈나면 큰 종이를 펴서 제대로 그림도 그렸다. 그렇게 정선에서 임계를 지나 백복령을 넘어서 동해로 넘어갔다. 그때 임계의 새벽 소시장 구경도 기억에 남고 백복령을 넘을 때 하얀 구름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로 달리던 버스에서 본 운해는 아직도 우리 둘만의 아름답고 경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정선의 절벽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서 검은빛을 띤다. 그리고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고 구불구불한 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휘어져 있어서 앞에서 보면 병풍 같고 위에서 보면 뱀이 꽈리를 튼 모습이다. 나는 그 절벽 그리기를 좋아해서 거대하고 또 아기자기 한 절벽이 있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며칠 씩 머물며 화첩 사생을 했다.

가을의 단풍과 어우러진 절벽의 아기자기 함은 바위와 나무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우게 했고 겨울의 메마른 절벽은 바위선의 골격을 어떻게 찾아야 탄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줬다. 지금까지 바위와 그 밑의 강을 넣어 구도를 잡는 추니박 식의 절벽 그림 구도는 바로 그 정선의 절벽에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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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소파가 있는 풍경-동강의 절벽', 68X186cm, 한지에 먹, 2009 / 그림=추니박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정선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몇 곳 있는데 그중에 가장 수려한 곳이 서울에서 태백으로 가다 예미라는 곳에서 좌회전을 해서 정선 방향으로 산을 넘어가면 고성산성이 나온다. 그곳에서 만나는 동강을 따라가며 정선으로 가는 길과 풍경은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 봐야 하는 풍경이다. 그 길에서 영화 ‘선생 김봉두’의 시골학교 배경이 됐던 연포초등학교가 있는 아름다운 연포마을도 만나고 주변의 아무 길이나 들어가도 예상치 못한 깜짝 놀랄 동강 풍경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운치리, 가수리, 귤암리의 절벽들은 구불구불 굽이치는 동강과 어우러져 눈물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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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사생', 35X45cm, 화첩에 먹, 2005 / 그림=추니박

해 질 녘 그 길에 서서 멍하니 절벽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그리고 한 같은 것이 피어난다. 왜일까 그곳에 특별히 어떤 사연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곳의 풍경이 지극히 한국인인 나에게 어떤 섬세한 감정을 불러내게 하는 힘이 있는 걸까! 아마도 나는 그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만나고 싶어서 그 장소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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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겨울 일출', 28X39cm, 화첩에 먹, 2006 / 그림=추니박

그 외에도 나전과 여량으로 가는 샛길에 있는 오장병이란 곳의 오형제바위산의 절벽과 화암약수터로 가는 길에 덕우리로 들어가면 내가 수도 없이 많이 그렸던 널따란 절벽이 있다. 그 절벽에 텐트를 치고 많은 청춘의 날들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화암약수터와 몰운대 사이의 절벽들도 아름답고 뭐니 뭐니 해도 여량에서 임계로 가는 샛길에서 만날 수 있는 구미정과 그 주변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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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풍경', 135X170cm, 한지에 먹, 2003 / 그림=추니박

고향을 떠난 사람의 마음,,,,성공해서 돌아가려고 열심히 사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처럼 나도 지금은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 같다. 왠지 정선에 가면 내 마음이 너무 초라하고 힘들 것 같아 정선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추억은 눈 감으면 나를 언제나 아름다웠던 그날 그 장소로 데려다준다. 정선역 앞의 황기족발과 콧등치기 그리고 정선 장에서 먹을 수 있는 걸쭉한 국밥과 방을 데우고 나를 기다리던 많은 민박집 사장님들이 무척이나 그리운 겨울이다.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 글·그림 추니박

추니박(박병춘)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을 비롯해 32회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 산수풍경시리즈를 시작하고 그동안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그는 2010년 중앙일보 주최 평론가가 뽑은 3040작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추니아트’로 미술 애호과들과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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