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30 11:20  |  오피니언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⑥]여행의 깊이를 깨닫게 해준 따뜻한 남쪽 고향,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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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바다를 날다 50X117 한지에 먹과 아크릴 2011 / 그림=추니박
[아시아아츠=글 그림 추니박]
누구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장소가 있다. 그 장소는 어떤 이에게는 한 곳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여러 장소일 수도 있다. 특별한 감정과 감각을 가지고 사는 나는 그런 장소가 여러 곳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와 이유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다.

내가 아름다운 섬 남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1학년을 다니던 88년부터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스케치북과 간단한 그림도구를 챙겨 들고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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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부두 12X18 종이에 펜 1988(대학1학년) / 그림=추니박

인천연안부두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부터 시외버스를 타고 서해의 어촌마을과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도착한 곳이 남해 미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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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무는 어촌풍경 미조 12X18 종이에 펜 1988(대학1학년) / 그림=추니박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 때문에 처음 내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어둠이 내리는 시간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때 눈앞에 펼쳐졌던 푸르스름한 회색 바다와 아기자기 한 미조항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흥분된 경험을 안겨 주었다. 풍경이 아련하게, 슬프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그날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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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는 미조항 12X36 종이에 펜 1988 (대학1학년) / 그림=추니박

나는 두 개의 엽서를 붙여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당시 연애 중이던 같은 과 친구, 지금의 와이프에게 그 감동을 글로 써서 보냈다. 깜깜해진 바다와 앞이 보이지 않는 언덕길 그 길에 서서 나는 예술가의 완벽한 고립감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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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지는 남해 30X23 화첩에 먹, 아크릴 2006 / 그림=추니박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나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스스로 대견하게 이 자리에 서있다는 자존감 같은 것들도 그때 그 언덕에서 느꼈던 것 같다. 그만큼 내가 선택한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한 어떤 확신이 나 스스로에게 필요했던 시기였다. 아직 예술이 무엇인지 또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던 대학 2학년 어느 날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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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남방산 12X18 종이에 연필 1988(대학1학년) / 그림=추니박

아직도 나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그 날의 스케치를 들추고 그 막막하고 어스름했던 그 날의 기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 기온은 세상사에 막막했던 내 청춘의 온기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라서 가슴이 찡하다.

어쨌든 그 칠흑 같은 어둠이 덮인 낯선, 미조항의 그 적막했던 분위기와 매운탕에 소주 한잔을 마시러 들어갔던 선술집의 시끄러운 풍경은 내가 오랫동안 남해를 찾게 되는 진한 향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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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포마을 30X72 화첩에 모필사생 2006 / 그림=추니박

그 이후 신혼여행을 포함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남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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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다랭이 마을 20X30 종이에 수채 2018 / 그림=추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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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정자가 있는 풍경 23X30 화첩에 모필사생 2006 / 그림=추니박

해안도로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을 들러 갓 잡아온 물매기나 생태를 사서 매운탕을 끓여도 좋고 산 중턱으로 난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랭이 마을을 하루 종일 그리고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골목마다 들어선 맛 집과 오래된 어촌의 식당을 찾아 지난 얘기를 나누는 재미도 좋고 병풍처럼 늘어선 해변의 나무들을 그리는 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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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집이 보이는 다도해 풍경 20X30 종이에 수채 2018 / 그림=추니박

그러나 남해에서 빼놓지 말아야 하는 구경거리는 남산 보리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도해 풍경이다. 보리암은 그 이름도 친근하지만 절벽에 위태롭게 올라선 절의 운치와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동선을 따라 걸어 다니는 맛이 일품이다. 절 뒤편 바위틈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 전망대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앞산에 커다란 바위가 올라선 풍경이 있고 그 뒤로 드넓게 펼쳐진 남해의 전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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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을 날다 72X142 한지에 먹 2016 / 그림=추니박

그리고 그 뒤로 여기저기 섬들이 신기루처럼 떠있다. 그 풍경을 그리다 보면 페러글라이더를 타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것을 타고 설레는 꿈이 있고 열정이 가득했던 철부지 청춘의 그날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순순했던 청년 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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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이 핀 남해 20X30 종이에 수채 2018 / 그림=추니박

남해는 이제 섬이 아니다. 남해는 아주 오래전 놓인 남해대교와 사천에서 넘어가는 창선대교 그리고 최근 새롭게 놓인 최첨단 다리 노량대교까지 세 개의 다리가 놓인 육지 아닌 육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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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길 20X30 종이에 연필, 수채 2017 / 그림=추니박

육지와의 왕래가 쉬워진 만큼 남해의 상권도 많이 없어진 상황이라 남해의 구석구석에 있던 작은 가게나 허름한 식당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차려주던 시골밥상을 먹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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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독일인 마을의 전경 20X30 종이에 수채 2018 / 그림=추니박

그리고 독일인 마을을 비롯해 여기저기 들어서는 테마파크 형식의 유럽식 펜션이나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그 풍경도 몰라보게 변했다. 바람을 피해 땅에 딱 달라 붙여지어 졌던 집들이 현대식 건물들로 대체되면서 그 옛날 남해의 어촌 풍경은 지중해의 한 마을을 보는 것 같다. 어차피 세월에 낡은 집들이라 다시 지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그나마 예쁜 집들이 들어서는 것이 화가인 나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한국인들의 눈도 많이 높아져서 풍경과 어울리는 집들을 짓고 자기가 사는 곳을 예쁘게 꾸미려고 하는 욕구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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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필사생-남해, 화첩에 먹, 2006 / 그림=추니박

그 덕분에 나는 최근 새롭게 남해의 풍경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집들이 새로 놓인 풍경은 또 새로운 구도를 낳게 하고 풍경의 해석을 달리하게 해 주니 앞으로 한참을 남해에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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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은점마을의 등대 20X30 종이에 연필, 수채 2017 / 그림=추니박

남해의 바다는 어느 곳보다 깨끗하다. 물 색깔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옥색이라 바닷가 바위 위나 작은 방파제에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게 된다. 그 색이 마치 유럽의 크로아티아 바다를 보는 것 같아 남해에 가면 유럽여행 때 머물렀던 크로아티아 바닷가의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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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양화금마을 20X30 종이에 수채 2018 / 그림=추니박

이제 내가 남해의 풍경에 푹 빠진 세월도 30년을 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남해의 곳곳을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여전히 나는 4월이 되면 창선교 앞에서 먹을 수 있는 멸치 쌈밥을 먹고 싶고 겨울이면 남해의 작은 어촌 항구에서 어부들이 갓 잡아온 생선에 매운탕을 끓여 먹고 싶어 남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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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창고가 있는 풍경 20X30 종이에 연필, 수채 2017 / 그림=추니박

남해의 바다와 섬은 내게 정신적인 고향 같은 곳이다. 나의 영혼이 쉴 수 있고 내가 치유되는 곳 남해는 나에게 유년의 그 낯선 여행의 기억을 통해 여행의 깊이를 새겨준 남쪽의 고향이다.

[추니박과 함께 걷는 그림여행] 글·그림 추니박

[추니박그림배우기] 한국화기초 매화나무그리기 / 출처='추니아트' 유튜브

추니박(박병춘)은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을 비롯해 32회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00년부터 산수풍경시리즈를 시작하고 그동안 독특한 작품을 발표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그는 2010년 중앙일보 주최 평론가가 뽑은 3040작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추니아트’로 미술 애호과들과 소통 중이다.



chang@asiaar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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