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3 08:30  |  오피니언

[미술을 말하다]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①

[아시아아츠 = 김창만 기자]
미술의 정체성의 문제는 서양 미술을 도입하는 초기 단계 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한국 화단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 화단 역시 “한국적 미술”을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서구의 미술을 수용하고 그에 도전하는 차별화의 장고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사는 정체성 모색의 역사, 나아가 정체성 개념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화단에서 정체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미술내적으로는 모더니즘이 정착되고 외적으로는 고도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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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1932~2006)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아트가,작곡가, 전위예술가이다 / 사진=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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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초유의 포스트모던 작품으로 기록되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비롯해 이후의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로 구성되는 백남준의 위성 삼부작은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 시그널을 알리는 사건들이었다. 그밖에 올림픽동반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국제전에 포스트모던 국제 대가들이 대거 초대되고 서구의 최신경향의 미술이 소개되면서 포스트모던아트가 한국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외래사조의 수용과 그것의 한국적 응용이 어느정도 이루어지자 한국 고유문화와 전통 미의식에 대한 각성이 촉구된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 미술인들은 서구미술의 일방적 추종을 지양하고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새로운 현대미술을 창출하여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조화라는 과제는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서 세계화를 위한 제일의 전략으로 확산되었고 현재까지도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작가들의 중대한 현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화단은 ‘대립적 민족주의’에서 ‘공모적 혼합주의’로 이동하는 정체성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인다. 후기구조주의의 사상에 동조하는 진취적 작가들, 정체성 문제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교포작가나 이산작가들은 탈문명적이고 탈이분법적 시각에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기반한 기존의 정체성 개념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정체성을 생성시킬새로운 담론과 미학을 대두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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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내부 관람광경, 1923년 6월 제2회 전람회 당시의 사진으로, 전람회 개최장소는 영락정(저동)에 자리한 상품진열관이었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국은 서양 미술의 도입기였던 근대 초부터‘모더니즘=서구화’의 등식을 벗어나기 위하여 자국의 전통에 유념하였다. 일제치하 1930년대에 대두된 향토성 논의는 바로 서구미술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거부로 내세운 전통의식의 표출이었다.

조선미술은 서구의 모방이 아니라 조선 특유의 정서를 지니는 향토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결국 전통과 풍속에 기초한 문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결정체라는 것이 향토사상에 입각한 조선주의의 논지다. 향토색은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적인 식민근성의 도피처라는 견지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본래 의미는 한국 고유의 미의식과 정신적 맥락의 탐구에 있다.

긍정적 의미의 조선주의는 식민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안이자 외래문화를 거부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전통회귀와 전통계승을 추구한다. 전통은 한국미의 특성에 대한 미학적 규정에서 찾아진다.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는 한국 미술의 특수성을 비애의 미, 자연의 미, 선묘의 미로 규정하였고, 고유섭은 그것을 무기교의 기교, 질박, 담소, 구수한 민예적인 미로 표현하였으며, 윤희순 역시 한국 고유의 미감을 이조 전통의 담백함과 청초함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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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푯돌(왼쪽), 고유섭의 저서 '송도고적' /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일제 강점기의 미술 사학자로, 호는 우현(又玄)이며 인천 출생이다. 고유섭은 미술사에 있어서 일찍이 유물 유적의 탐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적답사로 한국의 사찰 및 탑파를 찾아 연구하였고, 그곳에서 우리의 전통성을 찾으려고 하였다 / 사진=wikipedia
조선주의가 조선 전통에 근간했다면, 동시대 또하나의 이슈였던 동양주의는 서양 물질주의에 대한 동양의 정신주의를 기조로 고유한 미의식을 도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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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 '근원 김용준 초상', 1953, 53x70.5cm, 캔버스에 유채.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은 한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호는 근원(近園)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임시 학장을 맡았고, 그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 사진=변월룡유족소장
김용준은 정신주의란 아카데믹한 유미주의가 아니라 상징성을 띤 직관적, 표현적예술에 내재해있으며 그것의 동양적 장르가 문인화라고 주장하였다. 민족미술의 건설을 위해 문인화를 모델로 제시한 그의 뒤를 이어 1970년대에 일어난 수묵화 운동 역시 내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한국 전통에 대한 경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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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김용준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 종이에 수묵담채 155.5 x 45cm 1947년 / 이 작품은 김용준이 절친한 벗 김환기에게 결혼 3주년 기념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김환기의 아내는 이상과 사별한 구본웅의 여동생 김향안(본명 변동림)이었다. 김환기는 김용준보다 거의 열 살 아래였지만 같은 화가로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 사진=환기미술관
과거와 현재, 전통과 모더니즘, 서양의 물질문명과 동양의 정신주의를 조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미술적 노력은 전후의 대표적인 추상 사조인 엥포르멜과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본격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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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회화 No.7', 1958 / 사진=k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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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회화(繪畵) No.1, 1957, 캔버스에 유채, 95x82cm, 개인 소장/ 박서보는 1957년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으로 대표하는 ‘회화 No. 1’을 발표한다 / 사진=mmca
1950년대말 등장한 한국 엥포르멜은 기존 제도와 양식에 도전한 집단적 추상운동으로서 동양정신을 환기시키는 조형논리에 의거해 한국적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프랑스 엥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직간접 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지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붓질의 기원을 동양의 서체에 서 발견할 수 있고 화면과의 실존적 대면이 전후의 절박한 내면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한국적 변용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1950년대후반에는 미국정부의 후원으로 미국미술이 전시 및 책자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소개되어 한국 작가들이 미국미술에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미국의 전후추상을 현대화의 모델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후 곧 전쟁을 경험해야 했던 한국사회는 식민지배의 과거를 청산하고 자주권을 복구하려는 의지 간에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 팽배하여 있었다. 전후 분단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를 도입하여 근대화하면서 질서를 복구해 가는 시기에 젊은 한국 예술가들은 진보된 문화의 직접적인 모형을 서구 아방가르드에서 찾고자 하였다.

전후 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 한국미술의 현대화는 일관성 없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 안에서 전후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프랑스 앵포르멜 미술이 서구의 아방가르드로 특별한 구분 없이 유입되었다.

전후의 정황 속에서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전후 추상을 수용하여 한국 미술을 현대화하고자 했던 열광적인 관심과 노력을 뒷받침할 만한 문화적인 기반이 취약하였고 새로운 예술에 대한 비평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이에 대한 체계적인 수용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인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예술을 현대화하고 자 했던 노력에 기초하여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앵포르멜’이 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1958년 이후 앵포르멜이라는 용어가 산발적으로 자주 거론되기는 하였으나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으로서 앵포르멜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에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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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적 작가이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권위 있는 단체전 중 하나인 '니카텐(二科展, 이과전)'과 추상 미술 단체전인 '자유미술가협회전(自由美術家協会展)'에 출품했고, 1936년에 도쿄 니혼대학(日本大学) 예술학부를 졸업한 후 1937년에 귀국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현대미술 단체인 신사실파(新事實派)를 결성했다. 1956년에 파리로 떠나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9년에 귀국했다. 1963년에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 뒤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했다. / 사진=환기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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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의 김환기작품 전시전경 / 사진=환기미술관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하기 위한 미학적 시도는 1970년대의 지배적 사조였던 모노크롬 회화에서 한층 구체화되었다. 모노크롬의 주역들은 모노크롬 화면의 명상적, 비물질적 공간으로부터 서구 물질문명에 대응하는 동양 정신문화가 창출된다는 점을 역설하며 한국 모노크롬화를 서구 색면추상화나 미니멀리즘으로부터 구별짓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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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한국 미술평단을 이끈 이일(1932~1997)은 비평의 불모지였던 한국 미술계에 평론의 시대를 연 1세대 미술비평가다. 1957년 파리 소르본대에 유학한 그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 사진=wikipedia
모노크롬의 최대 옹호자인 미술비평가 이일은 백색이 정신적인 무색채이자 한국적인 색채라고 주장하면서 “모노크롬 미술공간은 한국 고유의 공간이며 서구 미니멀리즘처럼 논리 사유 공간이 아닌 원초적이고 자연적 세계로의 회귀”라고 피력했다.

한국 모노크롬화를 처음 일본에 소개한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역시 한국의 백색 모노톤은 색채의 요소가 아니라 "형태를 지우고 감축하는 조직적 요소”로서 “우주적 비전의 틀”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모노크롬 회화야말로 정신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점에서 서구의 그것과 차별화되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추상회화라는 것인데, 실로 엥포르멜에서 모노크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추상운동에 힙입어 한국 모더니즘 추상미술이 정립, 정착된 점에서 그 미술사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참고 : '최열,한국현대미술의 역사', '김희영,한국근현대미술사학', '김홍희,동아시아 문화와 예술'

김창만 기자 chang@asiaart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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