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드라마의 진화: HBO의 전설들, 그리고 ‘파인’으로 돌아온 임수정의 서늘한 매력

현대 TV 예술의 정점, 잊을 수 없는 HBO 명작들 현대 텔레비전 드라마는 단순한 킬링타임용 오락거리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작품으로 진화했다. 그 역사적인 흐름의 중심에는 단연코 HBO의 명작들이 자리 잡고 있다. 데이비드 사이먼과 에드 번즈가 탄생시킨 ‘더 와이어(The Wire, 2002~2008)’를 보라. 마약 거래부터 부패한 정치, 교육 시스템과 언론까지 볼티모어라는 도시의 폐부를 우아한 외과의사처럼 날카롭게 해부한 이 작품은 TV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줬다. 도미닉 웨스트, 이드리스 엘바, 랜스 레딕, 우드 해리스, 마이클 K. 윌리엄스, 클라크 피터스, 웬델 피어스 등 쟁쟁한 배우들의 숨 막히는 열연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에미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물론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스티븐 E. 암브로스의 저서를 바탕으로 제작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2001)’도 빼놓을 수 없다. 데미안 루이스, 론 리빙스턴, 도니 월버그, 셰인 테일러, 닐 맥도너 등이 이끄는 이 10부작 미니시리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유럽 전승 기념일까지 101공수사단 506연대 이지 중대의 희생을 압도적인 스케일로 그려냈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서사시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처절한 친밀함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권력과 돈을 둘러싼 셰익스피어 비극을 프라이빗 제트기와 고급 정장으로 포장한 ‘석세션(Succession, 2018~2023)’은 어떤가. 제시 암스트롱의 치밀한 대본 위에서 브라이언 코스, 제레미 스트롱, 사라 스누크, 키어런 컬킨, 매튜 맥퍼딘, 니콜라스 브라운이 연기한 로이 가문 사람들은 끔찍하게 이기적이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쓰이는 묘사를 보여준다. 특히 제레미 스트롱이 연기한 켄달 로이는 현대 TV 드라마가 낳은 최고의 비극적 인물 중 하나다.

판타지 장르의 역사를 새로 쓴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2011~2019)’ 역시 마찬가지다. 조지 R.R. 마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는 에밀리아 클라크, 키트 해링턴, 피터 딘클리지, 레나 헤디, 니콜라이 코스터왈도, 메이지 윌리엄스와 함께 드래곤이 실존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가차 없이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전 세계 시청자들을 거대한 커뮤니티로 묶어놓았다.

거친 서부 시대에 숨결을 불어넣은 데이비드 밀치의 ‘데드우드(Deadwood, 2004~2006)’는 셰익스피어풍의 운율과 개척지의 거친 욕설이 뒤섞인 독특한 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티모시 올리펀트, 이안 맥셰인, 몰리 파커, 브래드 두리프, 파워스 부스, 존 호키스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시대를 초월한다. 매튜 맥커너히, 우디 해럴슨, 미셸 모나한, 마이클 포츠, 토리 키틀스가 앙상블을 이룬 닉 피졸라토의 ‘트루 디텍티브(True Detective) 시즌 1(2014)’은 8개의 에피소드만으로 느와르를 주류로 끌어올렸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이 롱테이크로 담아낸 루이지애나의 습지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생한 캐릭터였다.

마지막으로 래리 데이비드가 제프 가린, 셰릴 하인즈, 수지 에스먼, JB 스무브, 리처드 루이스와 함께 현대 사회의 온갖 불편한 진실들을 유쾌하게 꼬집은 ‘커브 유어 엔수지애즘(Curb Your Enthusiasm, 2000~2024)’까지. 12개의 시즌 동안 즉흥 연기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이 생동감 넘치는 희극은 스크립트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코미디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을 개척했다. 이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시청자의 뇌리에 깊게 박히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공통점을 지닌다.

입체적 악역의 진화, ‘파인’의 양정숙 흥미롭게도 최근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도 과거 HBO 명작들이 보여주었던 다크하고 입체적인 매력의 캐릭터들이 쏟아지고 있다.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파인: 촌뜨기들’에서 임수정이 완성한 빌런 ‘양정숙’은 단연 돋보이는 사례다. 한껏 부풀린 머리 스타일, 윤기가 흐르는 트위드 투피스, 아찔하게 치켜 올라간 갈매기 눈썹과 새빨간 입술. 흥백산업의 젊은 사모님 양정숙은 겉보기엔 주변 사람들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우아함을 지녔다. 사근사근한 말투와 부드러운 미소 탓에 주변에서는 “여간 앙큼하지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아름다운 포장지 속에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탐욕이 숨겨져 있다. 흥백산업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의사와 결탁해 늙은 남편을 살해할 모의를 하고, 심지어 전 남편을 몰래 자신의 운전기사로 곁에 두는 대담함까지 서슴지 않는다. 계획이 틀어질 때면 우아함은 온데간데없이 안면 근육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신안 앞바다의 도굴을 소재로 보물을 건지기 위해 뛰어든 숱한 인물들 사이에서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양정숙의 화려한 언변과 카리스마가 가장 깊게 각인된 이유다.

“연기는 재밌게”, 한계를 깬 임수정 2004년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송은채 역으로 굳어졌던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완벽하게 깨부순 임수정은 이번 작품으로 자신의 연기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서늘하고 추악함을 넘나드는 악역을 소화해 낸 비결에 대해 그저 “촬영하는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재밌었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극 초반만 해도 강윤성 감독으로부터 “얼굴이 너무 착해 보인다”는 우려 섞인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촬영이 거듭되면서 그는 양정숙 그 자체로 깊게 몰입해 갔다. 분장차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촬영장으로 향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양정숙처럼 한쪽 손을 치켜들고 걸었을 정도였다. 스스로 즐기면서 연기를 하니 시청자들 역시 캐릭터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그는 요즘 연기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철저한 디테일과 원작자의 찬사 유튜브 쇼츠로 만들어지며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장면들에는 숨은 디테일이 있다. 남편 천 회장(장광 분)의 도장을 찾고 기뻐서 춤을 추는 씬이나, 사채업자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현장에서 감독이 불현듯 맘보춤을 춰보자고 제안했고, 연습이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감독이 곁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며 함께 춤을 춰준 덕분에 명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대목에서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무너져 내리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얼굴의 모든 근육을 아낌없이 일그러뜨렸다.

과장되지 않게 살려낸 1970년대 서울 사투리 역시 극의 몰입도를 높인 중요한 요소다. 그는 억지로 사투리를 만들어내려 하기보다는, 전작인 김지운 감독의 영화 ‘거미집’에서 1970년대 영화 속 인물을 연기했던 경험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초기 캐스팅 라인업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우려의 시선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명의 원작 웹툰을 집필한 윤태호 작가조차 원작의 양정숙이 진짜 바닥까지 처참하게 추락하는 인물인 만큼, 임수정이 왜 이 험난한 역할을 맡으려고 하는지 의아했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보란 듯이 그 모든 의구심을 압도적인 찬사로 뒤바꿔 놓은 임수정은 이제 평생을 따라다녔던 꼬리표를 떼어내고 다음엔 더 서늘한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새로운 포부를 다지고 있다. 명작 드라마가 복잡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완성되듯, 한계를 뛰어넘은 임수정의 다음 행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