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무대의 마법: 한국 창작 뮤지컬의 결실부터 시카고의 실험적 봄까지

무대 위에서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은 무력해진다. 17세기 르네상스 유럽과 조선을 오가는 장대한 서사가 객석을 압도하는가 하면, 지구 반대편에서는 관객이 직접 낡은 소방서 안을 거닐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최근 막을 내린 한국뮤지컬어워즈의 뜨거웠던 결산과 올봄 시카고 극장가가 내놓은 도발적인 라인업은, 동시대 공연 예술이 어떻게 과거를 재해석하고 또 새로운 체험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교차해 보여준다.

먼저 한국에서는 올 한 해 뮤지컬계를 총망라하는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창작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가 대상을 거머쥐며 그 묵직한 진가를 입증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번 시상식에서 편곡·음악감독상(이성준)과 무대예술상(서숙진)까지 휩쓸며 3관왕에 오른 이 작품은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17세기 루벤스의 동명 그림 ‘한복 입은 남자’를 단서로, 현대의 방송국 PD가 조선 시대 천재 과학자 장영실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해 나간다.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과 조선이라는 이질적인 시공간을 유려한 서사로 엮어내며 한국적 미학을 무대 위에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는 평이다.

객석 규모에 따라 나뉜 작품상 부문에서도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빛을 발했다. 400석 이상 부문은 이미 토니상 6관왕이라는 굵직한 족적을 남긴 ‘어쩌면 해피엔딩’이 차지했고, 400석 미만 부문에서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와 에세이를 원작으로 뒤늦게 한글을 깨치는 할머니들의 삶을 뭉클하고 따뜻하게 담아내 연출상(오경택)과 극본상(김하진)까지 3관왕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무대를 꽉 채운 배우들의 열연에 대한 찬사도 이어졌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짙은 감정선을 보여준 박은태와 조정은이 나란히 남녀 주연상을 수상했고, 남녀 조연상은 각각 ‘알라딘’의 정원영과 ‘라이카’의 한보라에게 돌아갔다.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신인상은 강병훈(‘베어 더 뮤지컬’)과 이성경(‘알라딘’)이 차지하며 차세대 스타의 탄생을 알렸으며, ‘에비타’ 팀은 끈끈한 호흡으로 앙상블상을 안았다. 무대 뒤에서 땀 흘린 이들에 대한 헌사 역시 잊지 않았다. 다수의 흥행작을 이끈 CJ ENM 예주열 공연사업부장이 프로듀서상을, 이선영(‘라이카’)과 도미니크 켈리(‘위대한 개츠비’)가 각각 작곡상과 안무상을 받았고, 오랜 기간 창작자들을 품어온 CJ문화재단이 공로상을 받으며 시상식의 의미를 더했다.

한국 뮤지컬계가 지난 시간의 치열한 결과물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면, 바다 건너 시카고의 봄 무대는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문법을 제시하며 관객을 맞이할 채비를 마쳤다.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벗어나 다감각적이고 몰입감 넘치는 실험들이 유독 눈에 띈다. 포티지 파크에 위치한 필라멘트 씨어터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에 열광했던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세계 초연작 ‘페어웰 오퍼튜니티(Farewell Opportunity)’를 선보인다. 주인공 할리가 NASA 제트추진연구소를 방문해 화성 탐사 로버 ‘오퍼튜니티’, 그리고 화성 임무를 총괄하는 과학자 타케이샤 모네와 예상치 못한 유대를 맺는 이 극은 우주라는 거대한 배경 속에서 존재와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젊은 세대를 위한 철학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을 주로 올려온 극단의 성향답게 단순한 서사를 넘어선 묵직한 울림을 예고한다.

최근 전 세계 극장가의 화두인 ‘관객 참여형 이머시브 연극’의 정점을 보여줄 작품도 기다리고 있다. 지역 극단 시카고 슈파츠가 기획한 ‘파이어 하우스(Fire House)’는 1873년에 지어진 니어 웨스트 사이드의 실제 옛 소방서 건물을 통째로 무대로 삼았다. 5월 15일부터 보름간 이어지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골동품이 빼곡한 방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역사극과 초현실주의, 정치 판타지가 기묘하게 뒤섞인 세계로 빠져든다. 연출을 맡은 시반 스펙터의 말마따나 소방관들의 평범한 일상처럼 시작된 극은 관객이 공간을 이동할수록 서늘하고 낯선 국면을 맞이한다. 배우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 밀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극소수의 인원만 입장시키며, 극장 안에서 누구의 뒤를 쫓고 어디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체험의 조각을 쥐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업타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튼 타임라인 씨어터는 고전의 예리한 해체와 재구성을 택했다. 6월 7일까지 이어지는 개관작은 헨릭 입센의 명작을 에이미 헤어초크가 도발적으로 각색한 ‘민중의 적(An Enemy Of The People)’이다. 론 OJ 파슨이 연출한 이 극에서 마을의 존립을 위협하는 치명적 진실을 마주한 의사는 그것을 덮으려는 기득권과 충돌하며, 끝내 자신이 지키려던 민중의 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1882년에 쓰인 텍스트가 2026년의 시카고 무대에서 ‘다수의 횡포’라는 섬뜩한 시대적 화두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지구 양편의 극장가는 캔버스 속 르네상스인을 무대로 소환하고, 백 년 전의 소방서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고전의 언어로 현대 사회의 환부를 찌른다. 무대는 박제되어 있지 않고, 그 위에서 쓰이는 이야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의 가장 예민하고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